2019 3-4월호 트레이거 CEO, 해로운 조직문화 어떻게 제거했나

HOW I DID IT

트레이거 CEO, 해로운 조직문화 어떻게 제거했나

 

 

 

 

 

출근해 보니 사무실 주차장을 소방차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2014 10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전날 중대 발표를 했다. 트레이거 Traeger가 창고와 트럭운송 사업부문을 닫고 UPS에 외주를 주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트레이거는 오리건 주에 위치한 캠핑용 요리기기 기업으로 내가 최근에 CEO가 된 곳이다.

 

외주는 전략적으로 합당한 조치였다. 우리는 이로 인해 영향을 받은 수십 명의 직원에게 관대한 퇴직금과 이직 알선 지원을 해준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보니 대형 트럭에 불이 났다는 걸 알게 됐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방화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고위경영진 팀을 모았다. 누군가가 바로 그날 아침 앨라배마 주의 한 회사에서 불만을 품은 직원이 동료 2명을 총으로 살해했다는 온라인 뉴스를 전했다. 이는 트레이거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고참직원 한 명이 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는오늘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회사를 대표해 임직원들을 다독거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했다. 일하면서 물리적 위험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직원들이 회사 자산을 불태우기 시작할 때나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 사건들은 거대한 문제의 극단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불신과 부정적인 태도, 협력에 대한 강한 거부감 등과 같은 해로운 조직문화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CEO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여러 달을 고민해 왔다. 트럭 방화가 일어난 날이 큰 전환점이 됐다. 기존 조직문화를 완전히 와해하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의 유혹

 

나는 빙빙 돌고 돌아 트레이거의 CEO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20대에 하고 싶은 걸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경영컨설턴트로 일했다. 많을 것을 배웠지만 그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후 6개월 동안은 주식 데이 트레이딩을 했는데, 내가 해본 일 중 가장 스트레스가 많으면서도 신나는 일이었다. 호텔을 짓는 기업에서도 일해 봤다. 닷컴불황 직후였던 2002년 하버드경영대학원을 졸업했을 때 나에게 관심을 갖는 곳은 경영컨설팅 업체와 부동산개발 기업뿐이었다. 내 이력서에 있는 경력이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 다른 일이 하고 싶었다.

 

부모님 집 지하실에서 두세 달 정도 지내다가 댈러스의 작은 냉동음료 기업의 파트너로 일을 시작했다. 내 경력에서 처음으로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창고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다가도 곧바로 은행 직원과 협상을 했고 그러다가 도매상에 제품을 팔곤 했다. 사업의 모든 분야를 접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 경험은 내가 사업가일 때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몇 년 후 누군가가 이어폰 및 헤드폰 업체인 스컬캔디Skullcandy의 창업자 릭 올던Rick Alden을 소개해줬다. 당시 스컬캔디는 매출 50만 달러의 작은 기업이었다. 아직 헤드폰 사업에 진출하기 전으로 스노보드 헬멧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있을 때였다. 2005년 나는 스컬캔디의 운영담당 부사장이 됐다.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항상 한 발짝 뒤처진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엄청나게 많이 배웠다. 릭이 외부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어서 우리는 아주 적은 돈으로 브랜드를 구축했다. 나는 결국 CEO 자리에 올랐고, 8년 동안 일하면서 회사를 매출 300만 달러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기업 상장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상장 후 내가 상장기업 운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너무 많은 주식 공매도 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상장을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았다. 2013년 초 나는 회사를 떠났고 직접 인수해서 경영할 수 있는 작은 기업을 찾기 위해 프라이빗에쿼티 기업에 가입했다.

 

 

어떤 마력을 가진 브랜드

 

40~50건의 매물을 들여다봤고 약 10건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브랜드 매니지먼트 분야 일을 했으며 나는 항상 내가 소비재 쪽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소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내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브랜드와 제품 만들기를 즐겼다. 내가 주목한 기업 중 한 곳은 천연재료로 사탕을 만드는 곳이었다. 최고급 믹서 회사를 거의 살 뻔하기도 했다. 어떤 기업이든 내가 사업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 아닌지에 집중했다.

 

트레이거는 탐색 아주 초기인 2013년 봄에 처음 알게 됐다. 26년 된 기업으로 우드펠릿 그릴이라는 걸 처음 만들어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름이나 범주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기원은 사람들이 난방용 기름의 대체용품을 찾던 1970년대 석유파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드펠릿 난로가 가정용 난방기구로 인기를 얻게 됐고 1980년대 초 오리건에서 난방업체를 운영하던 조 트레이거Joe Traeger가 같은 기술을 이용해 야외용 그릴 만들기를 시도했다. 전기모터로 나사송곳을 돌려 난로 내부 연소실에 우드펠릿을 공급하는 기술이었다. 펠릿 그릴은 온도조절장치로 열을 조절하기 때문에 일정한 온도로 훈제를 하는 데 특히 유용했다. 이 회사와 30분 동안 통화하고 난 뒤 나에게 맞는 기회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뒷마당 그릴 산업은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매우 상품화된 공간일뿐더러 금속을 구부리고 용접하는 일에서 경쟁우위를 찾기 힘들었다. 전화 통화 후 나는 두 번 다시 트레이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몇 달 후 나에게 트레이거에 대해 알려준 프라이빗에쿼티 기업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후 그들은 트레이거의 지분을 인수했고 당시 CEO와 파트너를 맺었다. 하지만 일이 잘 안됐고, 프라이빗에쿼티 기업은 회사를 이끌 만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매수할 수 있는 기업을 찾은 지 10개월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급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었다. 회사는 트레이거에 대해 좀 더 많은 연구를 해놓았다. 회사의 순수추천고객지수(Net Promoter Scores) 관련 새로운 데이터가 있었는데 엄청나게 좋았다. 트레이거 그릴을 사는 사람들은 지인들에게 제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하나씩 장만하라고 추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브랜드에 분명 숨어 있는 매력이 있는데 현재 사주가 성장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점이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우리는 내가 소주주이자 CEO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본사 방문하려고 오리건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의 조직문화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애초에 관여한 게 실수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멍든 가슴

 

첫 방문에서 두 가지에 집중했다. 판매 성장에 대한 잠재력과 현 경영진의 자질이었다. 개선의 여지가 많아 보였다. 회사는 2010년까지 그릴을 직접 제조해 오다가 최근 중국으로 제조를 아웃소싱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쟁업체들이 아웃소싱하고 있는 창고 운영과 배송 및 주문처리 업무를 2013년까지도 직접 하고 있었다. 심지어 트럭운전사들도 급여대상자 명단에 있었다. 직원은 오리건 본사에 120, 유타 세일즈사무소에 30, 미국 전역에 있는 90명의 위탁판매인력 등 약 240명이었다. 나는 가족과 유타 사무소 근처에서 살고 있어서 유타 사무소와 오리건 본사를 오가기 시작했다.

 

트레이거 조직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상당히 빠르게 감지했다. 프라이빗에쿼티와 나는 각각 소수 지분을 갖고 있었고 대주주는 여러 번 창업해 본 기업가로 플로리다에 살고 있었다. 그는 8년간 사주로 있었다. 나는 그가 고용한 여덟 번째 고위경영자였다. 일곱 명이 그만 둔 것이다. 직원들이 뒤에서 나를 스페인어로여덟이라는 뜻의오초(Ocho)’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나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행동에 그대로 나타났다. 데이터를 달라고 하면 무시했다. 본사를 방문했을 때 최고재무책임자(CFO)에게 나와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그의 상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케줄이 바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그는 나의 출장기간 중 결국 30분의 시간을 내주긴 했다.) 사람들에게 프로젝트에 함께 일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은 그냥 거절해 버렸다.

 

대주주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사 직원들과 하루에도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마치 그가 책임자인 양 행동했다. 대주주는 두려움의 문화를 만들어 놓았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고 그는 그걸 즐겼다. 최근에 취임 후 첫 90일 동안 그와 주고받았던 이메일을 다시 읽어봤는데, 내가 신중하고 차분하게 그를 대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는 공격적이고 모욕적이었다. 회사 내 다른 사람들도 그 스타일에 물이 들었다.

 

나는 더 나은 경영진을 데리고 와야 했다. 그래서 스컬캔디에서 가깝게 지냈던 임원 몇 명을 고용했다. 이는 의도치 않게 조직문화의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어 버렸다. 나와 새로운 경영진 대 대주주와 오래된 직원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조직문화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대주주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합류한 지 약 5개월이 지난 2014 6 20일 프라이빗에쿼티와 함께 그의 지분을 사들였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매년 사내 공휴일로 지정해 쉴 정도로. 이른바 트레이거 독립기념일이다.

 

우리는 소유권 문제를 해결한 이후 다른 이슈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처음 합류했을 때 트레이거는 7000만 달러 규모였다. 하지만 관리와 절차는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지 못했다. 창고는 낡고 작아서 우리가 원하는 성장세는 고사하고 현 거래량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재무 쪽을 분석하다 보니 유통채널 관리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고객에게 직접 제품을 팔았지만 에이스 하드웨어Ace Hardware나 대형 홈 임프루브먼트[1]체인 소매점을 통해서도 판매를 했다. 그런데 고객 직접판매 제품의 대부분은 소매 파트너들이 우리에게서 물건을 사가는 가격보다도 낮은, 크게 할인된 가격에 판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소매파트너들의 기분이 안 좋을 만도 했다. 우리의 그릴을 갖다 놓고 팔아 달라고 한 뒤에 온라인에서 그보다 싼 가격으로 팔고 있으니. 처음으로 박람회에 다녀왔을 때 나는 가슴에 멍이 들었다. 소매고객들은 하나 같이 제품은 비싼 값에 넘기고 끔찍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나를 강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본사에 돌아와서는 회사의 상위직원 30~40명과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감지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정량적인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조직문화 설문을 실시했고 익명의 피드백도 받았다. 새로운 미션과 트레이거를 이끌어갈 다섯 가지 가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소통을 시작한 뒤에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어 보였다. 많은 직원이 거기서 오랫동안 일해 왔으며(심지어 2세들도 있었다) 그들은 변화할 이유가 없었다. 내 시간의 75%를 본사를 떠나 다른 곳에서 보낸다는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원래 하던 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한동안 가족과 함께 오리건으로 이사를 갈까 생각해 봤지만, 그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상처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화

 

트럭 방화가 일어난 이후 해로운 조직문화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본사를 오리건에서 유타로 옮기기로 했다. 나와 대부분의 새로운 임원은 유타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의 내 인맥과 평판이라면 강력한 팀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오리건을 떠남으로써 우리는 트레이거에서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문화를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는 직원들을 두고 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45일 동안 비밀리에 계획을 짠 뒤 모두에게 알렸다. 값비싼 이전이었다. 우리는 내보내는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했고 새 본사를 준비하는 동안 오리건에 남아 일할 핵심 인력에게는 유지 보너스를 줬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구축할 수 있게 돼서 기뻤지만 조직 내 축적된 암묵지를 잃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크기의 기업은 조직 내 축적된 지식[2]에 따라 운영되곤 한다. 성문화된 부분이 많지 않고 업무방식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은 전달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돼 화가 나있을 때는 더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극적으로 이전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부정적 태도가 뿌리깊게 박혀 이 조직은 변화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창업의 장점 중 하나는 문화도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회사는 30년 동안 지속돼 왔지만 유타로 이전함으로써 우리는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셈이었다.

 

우리는 유타로 이전할 때 데리고 갈 직원을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창고와 트럭사업 부문을 닫은 뒤라 이 시점에 오리건에는 약 90명의 직원이 있었다. 우리는 능력과 문화적인 적합성에 따라 각각의 직원을 평가했다. 긍정적인 문화리더, 중립, 문화훼손자로 등급을 나누었다. 문화훼손자는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원하지

않았으니까. 문화훼손자들을 알아보기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재무부서에서 일했던 직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를 긍정적이고 명랑하다고 봤다.

그가 떠날 때 외부 HR기업과 퇴직 인터뷰를 진행해서 그 내용을 봤는데, 그가 얼마나 비열하고 부정적이었는지를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문화적으로 중립적이면서 새로 뽑기 어려운 자리에서 일하는 숙련된 직원들에겐 함께 유타로 가자고 권유했다. 문화리더는 단 2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도 초대했다. 우리는 90명 중 12~15명 정도가 우리와 함께 유타로 가기를 기대했으나, 그중 5~6명만이 실제로 옮겼다. 대체로 우리가 원했던 직원들은 회사에서 일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술을 배우고 싶은 야망이 있었고, 승진에 목말라 했으며, 맡은 임무를 쉽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장기근속 직원들은 적응능력이 떨어졌고 부정적 문화에 완전히 동화돼 버렸다. 우리는 격리수용의 관점에서 이를 생각했다. 우리가 만들려는 새로운 문화를 감염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데려가지 말아야 했다.

 

 

브랜드에 충실한 공간

 

유타의 본사는 공식적으로 2015 9월에 문을 열었고, 우리는 2016년 초 오리건의 마지막 직원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전한 뒤 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전 세계에 450명의 직원이 있으며 모든 지원자는 일자리를 제안받기 전에 나와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이력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위험 감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기술을 배우고 싶은지를 이해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고용하는 모두에게 엄격한 문화적 필터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가치에 맞춰 사는 사람을 찾고 싶다.

 

우리의 물리적 사무실은 새로운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브랜드에 진정 들어맞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건축가들과 논의했다. 이는 폐목재로 만든 가구가 있는 에너지 넘치고 야외 활동을 즐기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회의실은 트레이거의 과거 양상에 맞춰 이름을 붙였다. 하나는 애비(Abbey)라고 불리는데 이는 트레이거가 한때 수도원이었던 땅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요리하거나 앉아 있고 음식을 먹기에 적합한 아름다운 장소들이 많다. 우리 브랜드가 그릴의 금속과 기계가 아니라 요리와 음식에 초점을 맞춘다고 보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마다 회사 전체를 위한 아침식사를 요리하며,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점심을 함께 요리한다. 동료를 위해, 동료와 함께 음식을 준비하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쓴다는 걸 보여주는 방식이다. 사무실 디자인에 들인 자원 또한 이러한 점을 보여준다.

 

내가 트레이거에 합류한 후 우리는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 외에도 무척 많은 일을 했다. 전략과 마케팅, 제품 라인을 정비했고 소셜미디어와 현실에서 팬과 인플루언서(influencer)로 이뤄진 공동체를 만들었다. 나는 우리가 성취한 문화적인 변환이 대단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게 만들어 준 중요한 동인이라고 확신한다. 겨우 5년 만에 우리는 매출을 7000만 달러에서 거의 4억 달러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재무제표와 본사의 분위기에서만 뚜렷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소매파트너들도 변화의 증거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펠릿 그릴이 가스나 숯 그릴보다 나은 점을 고객들에게 알리는 걸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내가 이 기업에 처음 관심을 갖게 만든 연구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 한 번 펠릿 그릴을 사용해 보면 다른 그릴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연구 말이다.

 

 

번역 김선우 에디팅 이미영

 

 

[1]home improvement, 홈디포가 대표적 기업

[2]tribal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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